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최동원/선수 경력 (문단 편집) === 대학야구 시절 === || [[파일:최동원연세대.jpg|width=100%]]|| || 전성기 시절(1978년) || 원래 [[고려대학교 야구부|고려대]]에 입학하려고 했으나 [[중앙정보부]]의 강압에 의해 진학이 취소되었고, 이에 고향에 있는 [[동아대학교 야구부|동아대]] 진학을 하려했으나 이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진학을 거부받았다. 군대라도 빨리 다녀오려고 육군 경리단의 문을 두드렸지만 그 곳에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했고, 고위 관계자의 공작에 의해 결국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 경영학과로 진학하게 되었다고 한다.[* 1980-90년대의 영남의 야구선수들은 고려대에 진학한 선수들이 많았다. 특히, [[롯데 자이언츠]]의 야구선수 및 코칭스태프는 부산고-경남고/고려대 중 하나 혹은 둘 다 거친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롯데출신 유명 선수들 중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나오고 고려대를 졸업한 경우는 경남고 출신의 [[김용희]], [[손인호(야구)|손인호]], [[강봉규]], 부산고 출신의 [[양상문]],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마해영]], [[손민한]]등 매우 많은 반면, 연세대에 진학했던 롯데 선수 중 유명 선수는 최동원 외엔 부산고 [[김성현(1963)]], 부산상고(現 개성고) [[윤학길]]뿐이다. 지금이야 부산 출신 고려대 선수들이 롯데 자이언츠 쏠림이 줄었지만, 부산고 출신의 [[한영준]], [[조원우]], [[손민한]], [[진갑용]], 남기헌, [[정근우]], 부산상고(現 개성고) [[노상수]], 경남상고(現 부경고) [[이택근]] 등 부산지역 고교-고려대를 거친 유명 야구선수들은 결코 적지 않으며, 경남 출신의 야구선수였던 연세대를 나온 마산고 출신의 [[채종범]], [[신명철]](2명 이상 당시 선수 중 지금은 해체한 창원시내 용지초 나왔음), 강진규(지금은 해체한 완월초 출신) 등이며, 경성대를 나온 마산고 [[김경환(야구선수)|김경환]], [[김호(야구)|김호]] 김도형,소상필,윤기수 / 마산상고(현 용마고) 윤영환,이창원,정명진,진상봉,최상진,[[공필성]],전봉석,김동수,박지영,김석,김정현,임성민,[[장원삼]] 등이며, 그 중에서 경남대 출신 야구선수는 없으며, 반대로, 광주일고 [[이호성]], [[박재홍(야구)]], 광주진흥고 [[김정수(1962)]], 군산상고(現 군산상일고) [[김봉연]], [[조계현]], [[조규제]], [[나성범]](동생)-[[나성용]](형)(형제사이) 등 1980년대 호남출신 야구선수들은 연세대, [[이창욱(야구선수)|이창욱]]은 고려대로 진학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광주일고 출신의 국보급 투수라 불린 [[선동열]], [[염경엽]], [[김종국(야구)|김종국]], [[김상훈(1977)|김상훈]], [[여건욱]]은 고려대로 진학했다. 인하대에 진학한 광주일고 [[김기태(1969)|김기태]], [[박주언]] 광주진흥고 고형욱 이었다. 이는 아버지 선판규씨의 선택에 의한 것으로, 자세한 것은 [[선동열/선수 경력]] 참조.][[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295&aid=0000001165|출처 - 박동희 기자의 칼럼]] [[연세대학교]] 시절, 1978년 [[대통령기 전국대학야구대회]] 때 [[동아대학교 야구부|동아대]]와의 준결승전에서 [[임호균]]과의 1박 2일에 걸친 18회 연장 승부는 굉장히 유명했다. 14회까지 0:0으로 진행되다 일몰 [[서스펜디드 게임]]이 선언되어 다음날로 이어졌고, 결국 [[김봉연]]의 솔로홈런으로 최동원의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가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그러고도 최동원은 같은 날 곧바로 열린 [[성균관대학교 야구부|성균관대]]와의 결승전에도 선발로 등판하여 또 9이닝을 완투했고 이틀동안 무려 27이닝, 투구수 375개에 12피안타, 33탈삼진, 2실점을 기록한 끝에 연세대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죽 최동원의 투혼이 감동적이었으면 적장이던 [[김동엽(1938)|김동엽]] 성대 감독이 경기 후 마운드로 올라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할 정도였다. 그 소문난 [[다혈질]] 양반이 지고도 그런 반응이었으니 말 다한 셈... || [[파일:external/pds.joins.com/htm_2011091410292360006100-001.jpg|width=100%]] || ||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학교]] 경영학과 77학번 시절 || 하지만 다음 해 최동원은 본인의 선수 인생에 큰 전환점을 맞는 사건을 겪게 된다. 1979년 3월 21일, 대통령기 쟁탈 동국대와의 준결승에서 공군을 제대하고 2학년으로 복학한 [[박철순]]이 선발로, 3학년인 최동원이 마무리로 출전하였다. 이날 각각 2점씩 실점하여 경기는 4:2로 패배하였다. 경기에서 지자 박철순을 비롯한 연세대 선배들은 패배의 책임을 물어 최동원을 구타하였다.[* 선배들은 [[박철순]]이 폭행을 저지른 이유를 두고 박철순의 의도였는지 다른 선배들의 지시였는지를 두고 논란이 많은데 인터뷰와 당시 상황을 조합해보면 박철순의 의도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 사건은 박철순의 선수 인생에서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 있는 최악의 사건이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박철순]] 문서 참조.][* 참고로 당시 4학년이던 76학번 중 프로야구 선수는 양세종이 있다.] 그런데, 이때 허리를 잘못 구타하여 팬티가 피범벅이 되고 허리 아랫부분이 시커멓게 죽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근 100일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집에서 요양해야 할 정도였다고 하며, 최동원이 롱런하지 못하게 된 것 역시 이 사건의 영향이 매우 컸으리라고 여겨진다.[* 최동원이 이른 나이에 은퇴하게 된 이유 중에 가장 큰 점은 역시나 심각한 혹사였지만, 부상의 문제도 컸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과정에서 학교는 구타사실을 은닉하기 위해 최동원이 무단이탈했다는 언플을 한다. 훗날 야구계의 전설이 될 인재가 선배들의 조폭놀이 때문에 야구인생이 끝날 뻔 한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연세대학교]] 경영학과 77학번 시절 무시무시한 구위로 1978년 로마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1981년|1981년 대륙간컵 국제야구대회]]등 국제대회에서 맹활약하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스카우터들이 그를 주목했고,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공식허가를 받은 계약이었다. [[1981년]] [[9월 28일]] 승인] 까지 했으나 병역특례 혜택을 받은 뒤에도[* 당시 최동원은 1977년 [[니카라과]]에서 열린 야구 슈퍼 월드컵 우승으로 혜택을 받았다.] 5년 동안 국내에서 그것도 아마에서만 활동해야 대체복무로 인정되는 병역법 때문에 바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이후 아마가 아니라 프로에서 뛰는 것도 허용으로 바뀐다.] 병역말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계약이 최하급이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건 사실과 다르다. 4년에 옵션 20만 달러[* 올스타 선정시 해당 연도 2만 5천달러, 사이영상 수상시 해당연도 2만 5천달러] 포함 총액 61만 달러계약인데 이정도 금액이면 최하급이 아니라 오히려 특급대우다. 연봉도 첫해인 1982년에만 최저연봉인 33,500달러일뿐 바로 다음해 연봉은 66,500달러, 3년차에는 115,000달러, 4년차에는 185,000달러에 달했다. 당시 토론토의 1선발로 4년차였던 짐 크랜시의 1981년 연봉이 167,000달러라는 걸 생각하면 토론토 측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수 있다. 아니 애초에 프로리그조차 없던 국가의 투수에게 4년간 연봉을 무조건 보장한다는 시점에서 상당한 기대를 가졌다고 볼수 있다.[* 토론토가 계약서에 최동원의 향후 5년간 연봉을 명기하던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은 19만 6천500달러였다. 1980년 평균 연봉 14만6천500달러에 비해 34.13%가 증가한 액수였다.] 토론토는 프로 경험이 전무한 최동원이 입단 4년 차(1982년부터 뛴다는 가정 아래)가 되면 1981년 메이저리그 평균 연봉(19만 6천500달러)을 받을 수 있는 투수로 성장하리라 예상했고, 그래서 1985년 연봉을 18만 5천달러로 정한 것이었다. 토론토 시의회 의장이 한국정부에 최동원의 메이저리그 진출을 희망하는 진정서등을 넣었다는것은 기사로 확인된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22500329208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2-25&officeId=00032&pageNo=8&printNo=11511&publishType=00020|#]] 결국 블루제이스 측에서 계약 위반이라며 법정행 카드까지 들고 나오며 그후 몇년 동안이나 포기하지 않았으나 결국 최동원은 해외 진출을 포기하고 1983년에 [[롯데 자이언츠]]와 계약하게 된다. 다른 말로는 당시 프로야구 최대 흥행카드인 최동원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리그]]에 가면 흥행에 문제가 생길 것이라 생각한 [[높으신 분들]]의 압력이 있었다 카더라.[[https://youtu.be/L9tRBFXbSzg|#]][[https://youtu.be/-zuN0GTKW94|#]] [[연세대학교]] 1학년 시절의 최동원을 보고 일본 [[롯데 오리온즈]]의 '''[[가네다 마사이치]]''' 감독이 최동원을 스카웃하려 했으며, 병역문제 등의 스카웃 걸림돌을 회피하기 위해 최동원을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최동원 조부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는 [[루머]]도 [[http://blog.daum.net/ka052531/8866239|있었다.]] 하지만 가네다는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295&article_id=0000000659|2011년의 인터뷰]]에서 최동원의 존재는 잘 알았지만 양자 입적 이야기는 사실무근이라고 하였다. 어쨋든 당시 한국 여러 신문들에는 가네다가 최동원의 기량을 높게 평가하며 반드시 스카웃하겠다고 말했다는 기사가 많이 실렸었다. 최동원이 실업야구 시절부터 프로야구 롯데에서까지 혹사를 당했고 롯데에서 결국 토사구팽 당했기 때문에, 최동원의 팬들은 그가 대학을 졸업하거나 중퇴하고 바로 메이저리그나 일본프로야구에 갔었어야 했다고 안타까워 하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